택배는 집사 것, 박스는 고양이 것
고양이 키우면서 돈이 조금 아까웠던 순간을 꼽으라면 저는 숨숨집 샀을 때예요.
후기도 엄청 찾아봤어요.
“고양이가 너무 좋아해요.”
“한번 들어가면 안 나와요.”
이런 후기를 보고 저도 주문했죠.
가격은 거의 10만원.
택배가 오자마자 조립하고 안에 푹신한 쿠션도 넣었어요. 위치도 햇빛이 적당히 들어오는 곳으로 골랐고요.
그리고 고양이를 불렀어요.
“이거 봐. 네 거야.”
휴대전화까지 들고 기다렸습니다.
분명 새 집에 쏙 들어가는 장면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저희 집 치즈태비가 다가왔어요.
냄새를 한번 맡더니,
끝.
그대로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어디로 갔냐고요?
10만원짜리 숨숨집이 들어 있던 택배박스 안으로 들어갔어요.

그때부터 저희 집에는 이상한 규칙이 생겼어요
택배가 오면 물건은 제 거예요.
박스는 고양이 거고요.
처음에는 그냥 새 물건보다 박스를 좋아하는 특이한 취향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계속 보다 보니까 나름 이유가 있더라고요.
박스에 들어가면 몸의 대부분이 가려져요.
그런데 얼굴만 살짝 내밀면 거실은 다 보여요.
저는 보이는데 저는 쉽게 못 잡아요.
이게 중요한 것 같았어요.
특히 손님이 왔을 때 확실히 느꼈어요.
저희 고양이는 초인종이 울리면 일단 사라지거든요.
예전에는 침대 밑으로 들어갔는데 거실 구석에 박스를 놔둔 뒤로는 거기로 들어가는 날이 생겼어요.
완전히 도망가는 것도 아니고 박스 안에서 눈만 내놓고 계속 구경해요.
손님이 움직이면 눈도 같이 움직입니다.
안전한 곳에는 있고 싶은데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또 궁금한 거죠.
그때 알았어요.
박스가 단순히 싸구려 고양이 침대는 아니구나.
숨을 수 있는데 바깥도 볼 수 있는 곳.
고양이 입장에서는 꽤 괜찮은 자리였어요.

박스도 아무거나 좋아하는 건 아니더라고요
여기서 집사의 쓸데없는 실험 정신이 발동했어요.
택배가 올 때마다 박스를 하나씩 놔둬봤거든요.
엄청 큰 박스.
몸에 딱 맞는 박스.
높고 깊은 박스.
낮고 넓은 박스.
결론부터 말하면 제 예상은 거의 틀렸어요.
“이건 분명 좋아하겠다.”
하고 놔둔 박스는 무시하고,
“이건 너무 작은데?”
싶은 데는 어떻게든 몸을 구겨 넣었어요.
앞발 넣고,
머리 넣고,
엉덩이까지 밀어 넣은 다음,
본인은 아무 문제 없다는 표정으로 앉아 있었습니다.
그래도 박스를 고를 때 제가 확인하는 건 있어요.
몸을 웅크리고 안에서 방향을 바꿀 정도 공간은 있는지 봐요.
천장이 너무 낮아서 등을 누르지는 않는지도 보고요.
그리고 위치도 꽤 중요했어요.
처음에는 박스를 아무 데나 놨는데 세탁기 가까운 곳이나 사람들이 계속 지나다니는 곳에 있는 건 오래 사용하지 않더라고요.
반대로 벽 가까운 조용한 곳은 꽤 오래 있었어요.
그래서 지금은 박스를 놓을 때 제가 좋은 자리보다 고양이가 덜 방해받을 자리를 먼저 찾아요.
그리고 다묘가정이라면 출구가 하나뿐인 깊은 상자보다는 빠져나갈 곳을 하나 더 만들어주는 게 좋아요.
한 아이가 입구를 막아버리면 안쪽에 있는 아이는 나갈 방법이 없어지니까요.

박스 안에 있을 때 만지면 싫어하는 이유도 알겠더라고요
예전에는 박스 안에 들어가 있는 모습이 너무 귀여우니까 자꾸 손을 넣었어요.
머리 한번 쓰다듬고,
앞발 한번 만지고,
귀여우니까 사진 찍겠다고 얼굴 가까이 휴대전화도 들이밀고요.
그러다가 한번은 제대로 째려봄을 당했어요.
귀가 살짝 뒤로 가고 눈이 딱 말하더라고요.
“거기까지.”
그 뒤로는 박스 안에 들어가 있으면 웬만하면 그냥 둬요.
생각해보면 자기가 숨어서 쉬려고 들어간 공간인데 집사가 손을 계속 넣으면 숨숨집의 의미가 없잖아요.
박스 입구에 턱만 올리고 저를 구경할 때가 있는데 그때도 그냥 모른 척합니다.
그러다가 낚싯대가 앞을 지나가면 앞발만 쓱 나와요.
잡으러 몸 전체가 나오는 게 아니라 앞발 하나만 나옵니다.
그렇게 놀다가 귀찮으면 다시 들어가고요.
이걸 보고 있으면 고양이가 박스를 좋아하는 이유가 조금 이해돼요.
놀고 싶으면 놀고,
싫으면 한 발 뒤로 물러날 수 있어요.
결정권이 고양이한테 있는 거예요.
저희 집에서는 그래서 박스 안에 있을 때는 먼저 꺼내지 않는 게 규칙이 됐어요.

고양이 두 마리 이상이면 박스 하나로는 부족할 수 있어요
다묘가정에서는 이게 더 중요해요.
고양이 두 마리가 사이좋게 같은 박스를 번갈아 쓰는 모습을 보면
“우리 애들은 사이가 좋으니까 괜찮네.”
싶을 수 있잖아요.
그런데 한 마리가 박스 입구에 앉아버리면 이야기가 달라져요.
안에 있는 아이는 나오고 싶어도 상대를 지나가야 합니다.
사람 눈에는 그냥 같이 있는 것처럼 보여도 고양이 입장에서는 불편할 수 있어요.
그래서 박스나 숨을 공간은 한 군데에 몰아놓기보다 서로 다른 곳에 두는 게 좋더라고요.
가능하면 고양이 수만큼, 또는 그보다 여유 있게요.
물그릇이나 밥그릇, 화장실, 스크래처도 전부 한 장소에 몰아두지 않는 게 좋고요.
사이가 좋으니까 하나를 같이 쓰겠지.
이건 고양이가 결정할 일이지 집사가 결정해줄 일은 아니더라고요.

그리고 택배 오자마자 박스를 주면 안 돼요
이건 제가 몇 번 해보고 생긴 저희 집 노하우예요.
택배를 뜯으면 고양이가 귀신같이 와요.
제가 물건을 꺼내기도 전에 머리부터 넣습니다.
예전에는 그냥 줬어요.
그런데 어느 날 박스 바닥에 스테이플러 심 비슷한 게 남아 있는 걸 보고 식겁했어요.
그 뒤로는 무조건 제가 먼저 검수합니다.
저희 집에서는 이렇게 해요.
첫 번째, 송장부터 떼요.
개인정보도 있으니까 바로 제거합니다.
두 번째, 테이프를 전부 확인해요.
고양이가 테이프를 핥거나 씹는 경우도 있어서 박스 안쪽까지 봅니다.
세 번째, 스테이플러 심이나 끈, 비닐, 완충재가 남아 있는지 봐요.
특히 비닐은 박스 안에 그대로 두지 않아요.
네 번째, 냄새를 맡아봐요.
젖었거나 이상한 냄새가 나는 박스는 그냥 버립니다.
다섯 번째, 손으로 잘린 면을 한번 훑어봐요.
직접 출입구를 잘라준 경우에는 모서리가 날카롭지 않은지 꼭 확인해요.
이 과정을 다 통과하면 그제야 소유권 이전입니다.
택배 물건: 집사 소유.
검수 완료된 박스: 고양이 소유.
저희 집에서는 거의 이렇습니다.
가끔 옆면에 구멍을 하나 더 뚫어주기도 해요.
큰 출입구 하나 만들고 반대쪽에 앞발만 나올 정도의 작은 구멍을 내줍니다.
그리고 낚싯대를 바깥에서 살짝 움직이면 정말 잘 놀아요.
눈은 안 보이는데 장난감만 지나가니까 박스 안에서 앞발이 갑자기 튀어나옵니다.
단, 장난감 끈을 박스에 묶어두고 자리를 비우지는 않아요.
그리고 종이를 뜯어서 먹는 아이라면 박스 놀이 자체를 지켜보면서 하는 게 좋아요.

그런데 박스에 들어간다고 다 귀여운 건 아니었어요
이건 꼭 구분해서 봐야겠더라고요.
원래 박스를 좋아하던 고양이가 택배박스에서 낮잠을 자는 건 평소 모습일 수 있어요.
그런데 평소에는 거실 소파에서도 자고 창가에도 올라가던 아이가 어느 날부터 계속 숨어서 안 나온다면 이야기가 달라요.
특히 밥 먹으러도 잘 안 나오고,
물 마시는 양도 달라지고,
화장실 가는 횟수도 변하고,
만지려고 하면 평소보다 예민하다면
“요즘 박스가 마음에 드나 봐.”
하고 넘기면 안 될 수 있어요.
고양이는 몸이 아파도 티를 잘 안 내는 편이라 과도하게 숨는 행동이 건강 문제와 관련될 수도 있다고 해요.
식욕이 떨어지거나,
구토를 하거나,
숨쉬는 모습이 달라지거나,
배변에 이상이 있거나,
절뚝거리거나,
기운이 없는 모습까지 같이 보이면 동물병원에 문의하는 게 좋아요.
이럴 때 억지로 박스에서 끌어내는 것보다 저는 먼저 기록해요.
언제부터 숨어 있었는지.
밥은 얼마나 먹었는지.
물은 마셨는지.
화장실은 갔는지.
평소와 뭐가 달라졌는지.
병원에 가게 되면 이런 정보가 설명할 때 도움이 되더라고요.
10만원짜리 숨숨집은 결국 어떻게 됐냐고요?
사용합니다.
다행히요.
단, 제가 기대했던 방식은 아니에요.
어느 날 갑자기 들어가서 자더라고요.
제가 사준 지 꽤 지난 뒤였어요.
이미 마음속으로
‘저건 인테리어 소품이다.’
하고 포기한 다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또 웃긴 게, 한번 들어가기 시작하니까 한동안은 잘 써요.
그러다가 택배가 하나 오면요?
다시 박스로 갑니다.
이제는 저도 경쟁시키지 않아요.
비싼 숨숨집도 두고 박스도 둬요.
오늘은 숨숨집에서 자고,
내일은 박스에 들어가고,
더운 날에는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조용히 있고 싶은 날에는 구석에 들어갑니다.
고양이 입장에서는 어느 하나가 ‘최고의 집’인 게 아니라 그날그날 고를 수 있는 자리가 여러 개 있는 게 더 중요한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저는 이제 고양이 용품을 살 때도 조금 달라졌어요.
‘이걸 좋아할까?’도 생각하지만
‘싫어하면 다른 선택지가 있나?’
를 같이 생각해요.
이건 몇 번 돈을 써보고,
몇 번 무시당하고,
몇 번 택배박스에 패배하고 나서 생긴 집사의 노하우입니다.
해피엔딩에서 보호자분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함께 살았던 기억이라는 게 꼭 특별한 날에만 남는 건 아니더라고요.
택배를 뜯기도 전에 박스에 머리부터 집어넣던 모습.
비싼 집은 쳐다보지도 않으면서 찌그러진 박스에서는 세상 편하게 자던 모습.
박스를 버리려고 들었더니 갑자기 뛰어와서 다시 들어가던 모습.
같이 살 때는 그냥 웃긴 일인데 나중에는 이런 사소한 장면들이 이상하게 또렷하게 기억나기도 해요.
그래서 요즘은 택배가 오면 바로 박스를 버리지 않습니다.
테이프 떼고,
위험한 게 없는지 확인하고,
거실 한쪽에 슬쩍 놔둬요.
그리고 모른 척합니다.
고양이는 집사가 “여기 들어가 봐” 할 때보다
집사가 관심을 끊었을 때 더 빨리 들어가는 경우가 있으니까요.
이것도 몇 번 당해본 집사의 작은 노하우예요.
※ 이 글은 일반적인 행동·생활 정보이며 진단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갑작스러운 과도한 은신이나 식욕·배변·호흡 등 건강 변화가 함께 있다면 동물병원에 문의하세요.
참고 자료: Feline Veterinary Medical Association, 「Meeting the Needs of Your Cat」 및 「Setting Up the Environment for Success」; VCA Animal Hospitals, 「Feline Environmental Needs Guidelines」, 「Why do cats sleep in weird pla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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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동물과의 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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